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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불러온
1997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3)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가 불러온
1997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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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디지털서비스팀 권형우 매니저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투기자본의 동남아시아 상륙이 국가별로 어떤 영향을 미쳤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남아시아 국가의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전염과 우리나라의 IMF 사태의 전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외환위기의 북상! 대만의 NT$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다

대만 중정기념당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인해 IMF 구제금융을 받았던 1997년, 많은 사람들이 '을사늑약' 이후의 최대 치욕이라며 한탄하기도 했지요. 자, 이제 초점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넘어갑니다.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는 외환위기로 피해를 입었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과 가까웠던 남쪽의 섬 대만이 환투기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바로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우리나라 IMF 사태의 시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2년부터 대만의 통화 NT$의 가치가 다소 고평가되고 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요. 대만의 중앙은행도 이를 인식하고 점점 NT$의 가치를 점차 하락시키는 통화정책을 구사해 1997년 동남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에도 대만의 외환시장은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했습니다.

대만 시내 전경 사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https://commons.wikimedia.org)

하지만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의 외환위기가 확대되면서 대만 NT$ 역시 고평가되었다는 평가가 다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헤지펀드들이 역시 NT$에 대한 대규모 공매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만 중앙은행은 1997년 10월 17일, 이를 차단하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내립니다. 바로 외환시장에 대한 중앙은행의 개입을 중단하고 외환시장을 자율화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이 소식이 들리자마자, 대만 NT$의 가치는 바로 6% 급락하게 되었습니다. 대만 중앙은행의 신속한 발표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한 헤지 펀드 등 환투기 세력들은 목표를 바꿉니다. 바로 홍콩이었습니다.

당시 1997년 홍콩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100년 만에 반환이 이뤄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홍콩에 대한 투기적인 공격은 반환월이었던 1997년 7월~8월에 일어났습니다. 이때는 외환에 대한 공격 뿐 아니라 홍콩달러 선물과 항셍지수선물에 대한 대규모 선물 매도가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홍콩 통화당국은 먼저 홍콩달러 공매에 맞서기 위해 홍콩달러 차입에 필요한 오버나이트 금리를 급격하게 올립니다. 이에 은행 간 금리가 상승하면서 홍콩주가는 큰 하락을 겪게 됩니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전염되다

아시아 금융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홍콩마저 타격을 입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동남아시아와 일부 아시아 지역의 해프닝으로 보였던 1997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선진시장이었던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의 다우존스 공업지수의 경우, 1997년 10월 27일 7,715 포인트에서 하루만에 7,161 포인트로 554 포인트 이상 밀리며 큰 하락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홍콩 전경 사진

이에 동아시아의 금융에 대해 신뢰감을 잃게 된 국제 자본들은 홍콩을 중심으로 투자자금 회수에 나섭니다. 이에 당시 홍콩 자금시장에서의 외화자본 조달비중이 높고 다른 나라보다 단기외채 비중이 높았던 우리나라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이는 1997년 12월 IMF 구제금융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전초, 1997년 이전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은?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데에는 국제 환투기 세력의 바트화 매도로 시작된 동남아시아 금융위기가 큰 원인입니다. 하지만 사실 1997년 이전부터 우리나라 경제는 이미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우선 아시아 금융위기 이전인 1997년에 상당수 많은 기업들이 파산했습니다. 철강과 건설로 특수를 누리던 한보그룹이 2월 부도로 사라진 이후, 특수강 등을 생산하며 프로야구 초창기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야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던 삼미가 1997년 도산하는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머지않아 1997년 4월, 굴지의 주류기업이었던 진로가 부도 유예를 위한 자금 신청에 나섭니다.

당시 기준으로 진로 그룹은 계열사 24개, 연매출 1조6000억원, 재계순위 24위를 자랑했지만 유통, 전자, 건설 등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결국 외환위기 전 자금 부족으로 인해 채권단에게 부도를 막기 위한 유예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방직기업으로 출발해 미도파 등의 대형 백화점을 거느리고 있던 대농그룹도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사실상 부도 절차에 들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1997년 10월에는 아시아 자동차로 출발해 우리나라의 2대 자동차 메이커였던 기아자동차가 부도로 인해 국영기업화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1995년부터 꾸준히 추진되었던 준비되지 못한 개방화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OECD 가입 등을 두고 우리나라의 시장중 제조업, 서비스업 등 대부분이 전면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자본 및 금융시장도 1995년을 기점으로 개방을 시작했지요.

문제는 급속도로 개방이 이뤄지면서 주요 산업분야 등에 대한 규제가 완화된 데에 따른 시설투자 수요가 급증한 것입니다. 이에 많은 기업들이 무리하게 투자에 나섰다가 자본자유화에 따른 자본유입으로 인한 원화 고평가 등으로 수출부진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업들의 현금흐름이 마이너스로 전환하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는 1997년 초부터 시작된 대규모 부도 사태로 이어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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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도님의 댓글

기삼도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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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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